말은 흘러가지만, 기록은 남는다
재판정, 국회, 공청회. 누군가의 인생이 걸린 말들이 오가는 이 현장에서는 단 한 마디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는다.
오늘은 법원 속기사의 업무 일지에 관해서 소개하려고 한다.
그 속에서 모든 대화를 기록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속기사, 그중에서도 법원 속기사다.
말로 사건이 오가고, 말로 판결이 결정되는 곳에서
‘기록’은 곧 ‘진실’이고, 그 진실을 누군가는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받아적어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말의 기록을 생명처럼 여기는 법원 속기사의 세계를 조명해본다.
기록은 증거가 된다: 법정에서의 속기사 역할
법원 속기사는 재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발언을 빠짐없이 받아쓰는 전문가다.
기존의 필기와는 차원이 다른 방식, 속기 자판이라는 전문 도구를 이용해
순간순간 지나가는 말들을 초당 단어 단위로 입력해나간다.
📌 법정 속기사의 주요 업무:
형사·민사 재판에서 증언, 진술, 판사의 발언 기록
재판 속기록 작성 및 정서(정식 문서화)
조사 과정에서의 참고인·피고인 진술 속기
필요 시 자막용 속기, 자막 송출 연계 작업
특히 속기사는 단순히 “들리는 말을 받아쓰는” 것이 아니다.
말의 흐름, 화자의 의도, 중복 발언, 감정의 높낮이까지 포착해야 한다.
여기에 ‘OO씨가 말했다’는 형식이 아니라, 정확한 시점, 주체, 내용, 맥락이 맞아야만 법적 증거로 활용될 수 있다.
“저희가 기록을 잘못하면 판결이 달라질 수도 있어요. 매 순간 긴장의 연속이죠.”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재판의 말.
속기사는 그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캡처하고 저장하는 사람이다.
손보다 빠른 두뇌: 속기사의 기술력과 훈련
속기 자판은 일반 키보드와 다르다.
한 손에 4~5개의 키를 동시에 누르며 단어를 조합하는 속기 전용 기계를 사용한다.
이는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듯, 한 번의 동작으로 한 음절 혹은 한 단어를 입력하는 시스템이다.
🛠️ 속기 기술의 핵심 요소:
청취력: 다양한 억양, 발음, 말 빠르기를 실시간 이해
순간기억력: 짧은 시간에 수십 개 단어를 머릿속에 저장
속기 자판 능력: 분당 400타 이상, 정확도 99% 이상 유지
법률용어 이해도: 법률, 판례, 절차에 대한 기본지식 필수
이러한 능력을 키우기 위해 속기사들은 수개월~수년간의 훈련을 거친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속기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실무 현장에서 수습 기간을 거쳐
정식 법원 속기사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재판이 길어질 경우 2~3시간 이상 말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하며,
귀가 어긋나거나 잡음이 많아도 책임은 속기사가 진다.
“재판 중 판사님이 ‘기록에 남기세요’라고 말하면, 그 순간부터 제 말이 법적 문서로 남게 되는 거예요.”
정확성과 집중력, 그 어느 것도 흐트러질 수 없는 직업.
속기사는 말과 싸우는 사람이자, 기록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기록의 무게: 사명감, 윤리, 그리고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
속기사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일한다.
판결문에도 이름은 남지 않고, 기록이 남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그 한 줄의 문장을 남기기 위해선 수십 분의 고도의 집중과 검토가 필요하다.
🙋♀️ 속기사의 현실과 감정:
업무 강도: 재판 중 실시간 입력 + 종료 후 정서 작업
감정 노동: 충격적 증언, 비극적 사건을 매일 마주
윤리적 중립성: 개인 감정 배제, 기록만을 남겨야 함
사회적 인정 부족: “속기사요? 자막 따는 분이요?”라는 인식
속기사는 ‘듣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지만, 때로는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도 기록해야 한다.
살인사건의 증언, 아동학대 피해자의 울음, 이혼 소송의 격렬한 다툼까지.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기록은 공정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모든 단어를 그대로 옮긴다.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그날의 진실이 문서로 남았다는 거니까요.”
최근엔 자동 음성 인식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속기사는 사라질 직업’이라는 시선도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 재판에서는 정확한 맥락 이해, 중복 발언 구분, 사람 간 대화의 흐름 파악 등이 필수이기에
속기사의 역할은 오히려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말은 지나가지만 기록은 남는다”
법원 속기사는 법정에서 말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흐르는 대화를 붙잡고, 흔들리는 진술을 고정하며,
나중에 모든 것이 의심스러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증거의 문장’을 남기는 사람이다.
겉으론 조용하지만, 그들 손끝에서 남겨지는 기록은 한 사람의 인생을, 때로는 역사를 바꾼다.
기억은 사라져도 기록은 남는다. 그리고 그 기록 뒤엔 늘 속기사가 존재하고 있다.